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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하루키, 그가 말하는 근육과 육체, 그리고 소설 쓰기

by 귤희아빠 2018.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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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0대 중반. 수영 상급반에서 연습량이 늘어나면서 체력이 딸리는 것을 절감한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건강과 행복이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평생 현역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기 위해서도 체력이 필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자꾸 끌린다. 그의 글이다.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작정하고 장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에 내가 쓴 작품과는 적지 않게 다른 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아무튼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나 스스로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다음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올 소설이 어떤 것이 될지 기다리는 그것이 낙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끌어 안은 한 사람의 작가로서, 모순 투성이의 불분명한 인생의 길을 더듬어가면서 그래도 아직 그러한 마음을 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시 하나의 성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다소 과장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만약 매일 달리는 것이 그 같은 성취를 조금이라도 보조해주었다고 한다면, 나는 달리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따.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명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도쿄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체육관에 가서 근육 스트레칭을 받는다. 이것은 타력 스트레칭이라고 할까. 자기 혼자서는 효과적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의 스트레칭을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것이다. 길고 힘든 트레이닝 덕분에 몸 전체의 근육이 탱탱하게 뭉쳐 있어서 이것을 가끔 해두지 않으면 레이스 전에 몸이 펑크 나버릴지도 모른다.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 


스트레칭을 해주는 트레이너는 젊은 여성이지만 힘이 세다. 즉 그녀가 주는 '타력'은, 뭐랄까 강렬한 아픔을 동반한다. 반시간의 스트레칭이 끝나면 속옷까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버릴 정도다. "아휴, 이렇게까지 근육이 딱딱하게 뭉치도록 운동했군요. 경련 일보 직전이에요"라고 그녀는 언제나 감탄을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래전에 어떻게 되었을 텐데, 정말 이런 상태로 일상생활을 해올 수 있었다니 놀랍군요."


이대로 근육을 혹사하고 있으면 조만간 어딘가에 고장이 생깁니다, 라고 그녀는 말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든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나로서는-어디까지나 희망이긴 하지만-든다. 나는 줄곧 오랜 세월 동안 내 근육과 그런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 근육은 거의 팽팽하게 경직되어 있다. 아침 조깅 슈즈를 신고 달리기 시작할 때, 두 발이 너무 무거워서 이제 영원히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거의 발을 질질 끄는 것 같은 느낌으로, 느릿느릿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빠른 걸음걸이로 산책하고 있는 이웃 아주머니들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나 참고 달리는 사이에 근육이 조금씩 풀리고, 20분쯤 되면 어떻게든 다른 사람처럼 달리게 된다. 차츰 스피드도 붙는다. 그 뒤로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계적으로 달려갈 수 있다. 


말하자면 내 근육은 시동이 걸릴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종류인 것이다. 제대로 움직이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더디다. 그 대신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꽤 긴 시간 동안 무리 없이 무난한 상태로 계속 움직일 수 있다. 전형적인 '장거리형' 근육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 단거리에는 적합지 않다. 단거리 경기라면 내 근육의 엔진이 걸리기 시작할 때쯤에는 레이스는 벌써 끝나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근육의 특성은, 전문적인 것은 잘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근육의 특성은 그대로 내 정신적인 특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생각은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특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반대로 정신의 특성이 육체의 형성에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나의 맥박은 보통 1분 동안 오십 번 정도밖에 뛰지 않는다. 꽤 느린 편이라고 생각한다.(지난 시드니에서 금메달을 딴 다카하시 나오코 씨는 서른다섯 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달리기 시작해서 30분쯤 되면 그것이 일흔 번 가까이까지 올라간다. 전력으로 달린 직후에는 백 번 가까이 된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보통 사람과 같은 정도의 맥박 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도 확실히 '장거리형' 체질이다. 나는 매일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맥박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긴 거리를 달린다고 하는 기능에 맞춰 신체가 맥박 수를 조정한 것이다. 처음부터 맥박이 빠르고 그것이 거리를 달려감에 따라 점점 올라간다면, 심장은 바로 파열해 버린다. 미국의 병원에 가면, 우선 간호사에 의한 예비 진단과 같은 절차가 있어서 맥박을 재는데 언제나 "아, 당신은 러너군요"라는 말을 듣는다. 장거리 주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모두 비슷한 맥박 수로 되어가는 모양이다.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시간을 새겨 나간다.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스치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아무튼 내 근육은 지금 꽤 단단하게 뭉쳐 있다. 내가 아무리 스트레칭을 해도 여간해서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트레이닝의 피크 시기라고는 해도 그래도 너무 단단하구나, 하고 느낀다. 때때로 다리의 딱딱해진 부위를 충분히 주먹으로 탁탁 두드려서(물론 아프다)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상당히 완고하다는 것과 같을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 근육은 완고하다. 근육은 기억하고 인내한다. 어느 정도 향상도 된다. 그러나 타협은 하지 않는다. 융통성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얼굴이나 재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어도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더해가면 그런 안배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게 된다.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남아 있는 것만 써서 적당한(그리고 어느 정도는 맛있는) 요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사과와 양파와 치즈와 우메보시밖에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오래간만에 도쿄의 거리를 달린다. 9월의 도쿄는 아직 덥다. 도회지의 늦더위의 혹독함은 특별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묵묵히 달린다. 모자가 눅눅하게 땀에 젖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몸에 땀이 흩어지는 것이 보인다. 땀이 흩어지는 모습이 그림자가 되어 노면에 뚜렷이 비친다. 흩어진 땀은 도로에 떨어져서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장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모습은 똑같아 보인다. 모두 뭔가를 생각하면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더운데 잘도 달리고 있구나, 하고 감탄을 하게 마련이지만,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엔 코스를 달리고 있는 도중에 지나가던 여성이 말을 건다. 독자 중 한 명이다.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이지만 간혹 있다. 발을 멈추고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이제껏 20년 이상 선생님 소설을 읽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10대 후반부터 읽기 시작해서 지금은 30대 후반이다. 사람은 모두 공평하게 나이를 먹어간다. "고마워요"라고 나는 말한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악수하고 헤어진다. 내 손은 아마 땀에 젖어 축축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리고 나는 또 달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녀의 목적지-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를 향해서 걷기 시작한다. 나는 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 달린다. 나의 목적지? 물론 뉴욕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회고록>(문학사상, 무라카미 하루키, 2007)

제4장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중에서.(126쪽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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