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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을 쓰는 방식

by 귤희아빠 2019.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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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대학 재학 중에 결혼해 1974년부터 칠 년여 동안 아내와 재즈 카페를 운영합니다. 

서른 살을 앞둔 1978년 도쿄 신주쿠 진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번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자신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날 밤부터 가게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생애 최초의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1979년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누구를 위해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 왜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내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쓰는 방식을 보면, 글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초안은 생각나는대로 쓰고, 계속 고쳐 쓴다. 하루키도 이 방식으로 쓰는데요. 어떻게 고쳐 쓰는지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의 말을 옮겨 적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사 간, 2016년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00매를 쓸 수 있습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중략)

하지만 장편소설의 집필은 야구와 달라서 일단 초고를 완성한 그때부터 다시 또 다른 승부(게임)가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가 그야말로 시간을 들일 만한 보람이 있는 신나는 부분입니다.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한숨 돌리고(그때그때 다르지만 대개는 일주일쯤 쉽니다)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내 경우, 첫머리부터 아무튼 죄다 북북 고쳐버립니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봅니다. 나는 아무리 긴 소설이라도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이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척척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에 단연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순되는 부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이 중간에 홱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시간 설정이 앞뒤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삐걱거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조정해서 이치에 맞는 정합적인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째로 빼버리고 어떤 부분은 늘리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여기 저기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중략)

그 고쳐 쓰기 작업에 한두 달은 걸립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일주일쯤 쉬었다가 두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것도 첫머리부터 쭉쭉 고쳐나갑니다. 단지 이번에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꼼꼼하게 고칩니다. 이를테면 풍경 묘사를 세밀하게 써넣거나 대화의 말투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스토리 전개에 맞지 않는 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한 번 읽어서 알기 어려운 부분은 쉽게 풀어 써서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대수술이 아니라 세세한 수술을 하나하나 더해가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한숨 돌리고 그다음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술이라기보다 수정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소설의 전개에서 어떤 부분의 나사를 단단히 조여야 할지, 어떤 부분의 나사를 조금 헐렁하게 풀어둘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중략)

그리고 대개 이때쯤에 한 차례 긴 휴식을 취합니다.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혹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사이에 여행을 하거나 번역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합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장 등에서의 제작 과정에, 혹은 건축 현장에 ‘양생’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둔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그렇게 일단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작품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


양생도 진득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 수정도 마쳤다. 자, 이 단계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제삼자의 의견입니다. 내 경우, 작품으로서 어느 정도 형태가 갖춰진 참에 우선 아내에게 원고를 읽어달라고 합니다.

(중략)

그런 제삼자 도입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그런데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설령 ‘이건 완벽하게 잘됐어. 고칠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입 다물고 책상 앞에 앉아 아무튼 고칩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장이 ‘완벽하게 잘됐다’라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으니까.


이번의 고쳐 쓰기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된 부분, 비판받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고쳐나갑니다. 그리고 고친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달라고 하고 그것에 대해 다시 토론을 해서 필요하다면 또 고칩니다. 그것을 다시 읽어달라고 해서 아직도 불만이 있다면 또다시 고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참에 다시 처음부터 수정해서 전체적인 흐름을 확인하고 조정합니다. 여러 부분을 세세하게 손질한 탓에 전반적인 톤이 흐트러졌다면 그것을 고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편집자에게 정식으로 읽어달라고 합니다.

(중략)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문장이든 반드시 개량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잘 썼다’ ‘완벽하다’라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퇴고 단계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져버리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고 노력합니다.


아무튼 고쳐 쓰는 데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참고하며 고쳐나갑니다. 조언은 중요합니다.

(중략)

몇 번이나 퇴고를 해야 하느냐, 라고 물어도 정확한 횟수까지는 잘 모릅니다. 원고 단계에서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쳤고, 출판사에 건너가 교정지가 된 다음에도 상대가 지겨워할 만큼 몇 번씩 교정지를 내달라고 합니다. 교정지를 새까맣게 해서 돌려주고, 그렇게 해서 재차 보내준 교정지를 다시 새까맣게 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의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는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HB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낍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일이 진짜로 재미있어요. 하염없이 하고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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